당사자의 입장

ARTICLE 2021-01-21

교육설계에 앞선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면서 당사자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그런 사고의 기초가 되는 것이 비슷한 상황의 규제를 상상해 보는 연습방법이 요구된다. 다음은 상상시나리오의 몇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상황과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문화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순 있겠지만 시나리오로 상상하면서 당사자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는지 유추해 보는 것이다.

1) 성인건강보호법이 입법되고 술은 45세미만, 담배는 60세미만이 구입할 수 없게 된다면... 2) 중. 고등학교에 콘돔자판기가 설치되고 보건실에서 피임약을 나누어 주는 제도가 생긴다면... 3) 의무교육이 대학까지 확대된다면... 4) 대한민국의 모든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직장인 두발규제가 시행된다면... 5) 근로기준법이 1일 근로시간을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4시간으로 규정한다면...

“아는 것”에 관심이 간다. 사람들이 모여서 연예인들의 루머를 끊임없이 하고, 뉴스에 그들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아는 사람의 기준이 모두 다르겠지만,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는 사람이 나오기에 텔레비전은 더욱 재밌어지고, 그렇게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근 가수는 웃겨야하고 개그맨은 과장된 변장을 서슴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고/아는 만큼 들리고/아는 만큼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교육설계를 할 때 어떻게 ‘아는 것’을 마주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장면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잘 사용/활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내가 습득한 지식을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메타적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못하는 것을 해내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박수를 보낸다. 인류의 몇%가 해낸 성과를 보고 모든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것이나, 잠재력을 끌어올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전자는 인류의 몇%고 후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가깝다. 간혹 인용되는 소극적 교육(루소가 말한)이란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방법론에 가까운 발상이다. 즉, 교육자의 개입이 최소화 되었을 때 잠재력이 발현되고 자생력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내용이 발생한다. 나 스스로 어떤 교육적 태도를 준비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편견과 통계치

JOB SOUND 2021-01-19

미디어를 통해 노출하는 각종 통계치를 읽곤 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87%는 이러쿵,
서울거주 30대 여성의 25%가 채 되지 않는다고 저러쿵.

편견을 버리기 쉽지 않다.

예술교육 기획자의 시선_공생과 예술교육에 대한 노트

ARTICLE 2021-01-14
  1. 며칠전 갑자기 눈이 내렸다. 집 밖에 나가서 현관문 근처를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다닐 수 있다. 아이들의 눈싸움과 썰매놀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길이 오픈되어야 한다. 그래서 눈이 오면 입구를 빗자루질 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 쓸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 쌓이고 있는데 나와서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걸 여태 몰랐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너무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공동주택인 아파트로 이사와서도 나는 내려가서 눈을 쓸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쓸어야 한다. 그래서 나간다. 경비아저씨들과 관리소 사람들에게 관리비를 냈으니 그들이 쓸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관리비를 더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눈길을 그들 몇명이 혹독한 노동을 해야 하는 쓸쓸한 공간으로 놔두고 싶지 않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를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위탁하는 그 순간을 목격한다면 그곳에서 공동체성을 말하긴 쉽지 않다. 공동체성은 누구네집 숟가락 숫자나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닥치고 일하는 것에 가깝다. 제발 좀 떠들기 앞서 휴지를 줍고, 공유마당을 청소하라고 얘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2. 공동체는 배려를 통해 공생하며 산다. 그 당연한 배려를 다른 이름으로는 희생이라 부르기도 했고, 어떤 관점으로는 협업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십년 전만 해도 마을 노인의 죽음은 공동체를 움직이곤 했다. 자기 집에 있는 식기를 꺼내와 팔을 걷어붙이고 모여들던 아주머니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손님맞을 준비는 가족과 더불어 이웃사람이 함께 힘써 해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현재 이런 풍경은 특별한 것이어서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거나 영화속에 등장한다. 낡은 것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적영역에 침범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생활상이라고 접어두자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게 된다. 현대인에게 이런 관계의 문제는 이웃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성원을 의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에 과하게 이입하여 사회를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의 든든한 지원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써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재화의 교환이나 지불로 대체된다. 돈을 주고 사거나 그와 유사한 거래로 변해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관계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던 문제가 재화와 사회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전되었다. 이때 재화와 힘을 갖지 못한 공동체 성원이 느끼는 것이 분노와 상실감이다. 문화와 예술은 한 인간의 태생적 배경이 되어버린 습속에 근거하는 경험영역에 있다. 문화는 환경이며 예술은 경험재다. 생성조건이 온전하여 자연발생하며 이전의 경험속에 추론한 행위라는 뜻이다. 한 개인은 물리적 독립조건을 충족시키면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농축된 문화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예술교육은 개인의 문화/예술적 성장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와 상실감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한, 개인의 성장에 교육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모두들 자신이 우리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보고 해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더라. 넘쳐나는 자칭 전문가 그룹의 등장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병리현상이나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내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기 급급하다. 하지만 사회적 항상성이 어느 시점에 정상작동할 것인지 기다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또 어떤이는 사회가 자정능력을 가진 유기체라며 스스로 구경꾼을 자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힘을 보탠적이 없으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통과 사회적 소외가 가해지기 전까지는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낼 수 없다. 단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야 할 때는 분명히 찾아왔다.

  3. 흔해빠진 예술교육 포럼에서 발표자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기억이 있다. 소득수준과 학력은 문화향유능력과 비례곡선을 그린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문화와 예술의 향유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문화콘텐트를 소비하는 능력으로 놓고 보면 그 이야기는 타당성이 있다. 전시를 관람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미적 탐색능력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누구와 공연을 볼 것인가 (-> 즉 관계방식과 관계의 질에 대한 문제다), 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가(-> 문화와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슈다), 내가 원한 콘텐트를 소비하는 주체인가(-> 복지의 시각에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게 되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남들만큼은 우리도 한다는 시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 문화소비의 주체 각종 문화와 예술을 개별 콘텐트로 떼어놓고 상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단체로 관람을 시켜주면 문화예술의 향유자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라고 보는 도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개인으로서 10대 청소년은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전제하거나, 농산어촌의 분교에 다니며 농사가 주업인 부모를 둔 10대 청소년은 TV이외의 문화수용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강둑을 걷고, 바람의 냄새로 하루를 점치는 문화적 환경은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거리를 걸으며 오브제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것은 도서산간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 즉,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니다로 선을 그어선 곤란하다. 소비가능한 예술경험을 중심에 두고 우리는 예술과 예술교육을 말할 순 없다. 촌스러움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질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촌에사는 사람이 촌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하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술교육은 어떤가. 촌스럽다는 자연스러움을 얼만큼이나 존중할 수 있는가 질문해야 한다.

쓰다 말았던 글

ARTICLE 2021-01-12

(2014년에 어딘가에서 원고 부탁 받고 쓰다가 말았던 것 같다.
아마 다른 주제로 글을 보내지 않았을까?)

"시간"에 대한 객관적 정의는 없으나 조작적 정의나 약속의 개념이 있다. 시간에 대해 가장 오랜 관심을 가진 학문은 역시 천문학이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대적 시간을 증명해내면서 (굳이 표현하자면)뒤틀렸다. 표준시간이란 그래서 천체를 중심으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맞춰놓은 것이거나 약속의 개념이된다. 그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가 궁금하다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는건 분명하다. 봉건제 해체 이후 농민계급이었던 노동자에게 더 많은 생산을 요구하기 위해선, 더 효율적 관리 대상으로 시간개념이 확보되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표준시각은 인간을 시스템으로 몰아갔다. 표준이 된 시간은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참 무서운 결과를만들어낸다. 가장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 170만년전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인류는 신화로 존재하는 아이테르를 바라보며 지구에 적응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에너지원이 되는 태양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연의 시스템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명은 그 에너지를 어떻게 다루는가로 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문제는 소유다. 초기인류의 생존을 위한 투쟁적 관점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투쟁은 현재시점까지 계속되는 것이란 말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토인비가 말한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시간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의 개념이 되었단 말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시간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 시간은 생산량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체감하는 시간이란, 물리적 사건의 연속선의 한 지점이거나 독립적 물리량을 갖는 비연속적 객체라고 보기 보다는 재화와 교환되며 소비를 가능케하는 화폐와 유사하다. (물론 이 관점은 생산주체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쓰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긴 싸움이 계속된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다"라고 역설하는 자기계발서를 보면 한심한 이유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타인의 시간 노예다"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2014년 4월. 한국사회는 기능이 정지된 정부로 인해 무력감을 갖는다.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시작된 무력감이다. 이 글은 세월이라는 시간개념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의 조각 중 하나다. 왜...라는 질문이 자꾸 생기지만 결국 기능상실의 가장 큰 원인은 모두가 타인시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거다. 매뉴얼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할까봐 나는 더 무섭다. 매뉴얼은 이미 있다. 엉성한 것이 문제다. 그럼 완벽한 매뉴얼은 존재할까? 그건 사건이 잘 수습되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시키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설명도 지금은 설득력이 없다. 타인의 시간을 사는 것이 당연해진 사회에서 그 무엇도 각성할 수 없이 마비된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앱테라

Buscant 2021-01-11

Aptera는 전기차의 솔라시스템을 개발중이다.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이런거 개발하는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을까 싶다.
공기저항을 거의 받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강조하는데 그 만큼의 속도는 나지 않는다. ㅋㅋㅋ. 일종의 바이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기도.
솔라패널 장착하고 얼만큼의 효율을 구현할 지도 기대되는 중.
단, 저 디자인에 앞뒤로 번호판 붙인다고 생각하니 끔찍.

실례

JOB SOUND 2021-01-10

무슨 웹툰 같은데서 본건데 시대는 모르겠으나 족히 천년 전이 배경인 듯 했다.
길에서 괴한을 만난 여인을 무사가 구해준다.
여인이 묻는다.
"고맙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무사가 대답한다.
"실례입니다."라며 사라졌다.
여인은 생각한다.
'아. 나의 생명의 은인 실례님...'

그저 그런 개그겠지만,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하다 보면 정황이나 자기가 내 뱉은 말과 행동 따위가 잊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사소통은 그렇게 어렵다.
음성언어를 내 뱉을 줄 안다고 소통이 되는게 아니다.

Ground

ARTICLE 2021-01-08

수년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12세가 되기전에 꼭 경험하길 권하는 리스트가 있었다. 나무타기, 큰 언덕에서 굴러 내리기, 야생 자연에서 야영하기, 나무 은신처나 동굴 같은 아지트 만들기, 물 수제비 뜨기, 빗속에서 뛰어다니기...등등. 이 리스트를 보면서 반드시 꼭 해봐야 할 것이 아니더라도 위험하여 금지되거나,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버린 한국의 문화환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어다니기도 쉽지 않은 한국의 12세 전후 사람들에게는 참 힘든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창의력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무엇인가 만들고 조작하고 사용하는 경험을 통한 창의성 발견은 발생환경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자연이 가까이 있지 않고, 인위적인 공간이 전부인 성장환경에서 창의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단지 창의성을 흉내내거나, 조악한 관념을 창의라고 말하기 쉽다. 경험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_페르소나와 거짓말

ARTICLE 2021-01-08

피노키오는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원작이 한국에 소개되고 읽힌것은 최근 몇 년 사이지만, 우리는 동화속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읽고 자랐다. 누구나 알고 있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그 이야기. (원작에서는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짧아지거나 코가 길어지는 두 유형이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를 동화의 설정과 무관하게 바라본다면, 아마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화 속 피노키오의 거짓말은 누구나 쉽게 알아챈다. 다른말로 "들킨것"이다.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금기라고 배워왔다. 그건 누군가를 해하는 것일 때 더욱 그렇다. 반면, 거짓말은 살아가면서 어떻게 써야하는지 터득해야 하더라. 다른말로 배워야 하는 기술과도 같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진심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하지만 어떤 페르소나를 가졌는가에 따라 관계가 유지되거나 깊어지지고, 때론 험악한 말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즉, 페르소나는 자아와 다른 거짓말의 외형이지만 살면서 자기를 지키는 힘이기도 한다. 나의 속마음을 다 들켜버렸을 때의 황망함. 감추고 싶거나 모른척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났을 때의 수치심.

혹시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까.

퓨처랩 SEED "페르소나와 거짓말" 원고의 일부

공간_워크숍 초대

ARTICLE 2021-01-08

10대의 방

  1. 공간(空間/space) 공간은 시간과 더불어 세계의 기본형식에 해당합니다. 물성의 존재방식을 구현하는 장(場/field)이자 사건의 매개 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공간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공간안에서 일어나고, 공간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공간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등의 자연과학에서 연구하고 정의하려 시도하지만, 철학, 심리학, 종교 역시 이 공간에 대해 성찰하고 해석합니다. 공간 만큼 다양한 조어가 가능한 언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2. 문화와 공간 간혹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특강 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우리 아이랑 대화가 줄어들어요. 더 많은 대화를 위한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물론 여러가지 복합적인 가정의 환경과 다양한 이유에 의해서 부모가 바라는 행동과 자녀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다름아닌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화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사건에 해당합니다. 집에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어느순간 거실에는 커다란 TV가 놓여져 있고, 소파는 TV를 일방적으로 향해 있습니다. 사람이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마주보고 앉게 되는 구조라면 대화의 공간일까요? 문화와 공간은 이렇게 밀접하게 상호작용합니다. 대화문화가 인간관계 안에 존재하길 바란다면 그에 따른 공간에 대한 탐색과 정착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3. 10대의 프라이버시 인간은 독립적 성장을 위해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야 합니다. 건강한 자아형성을 위해 우선시 해야 하는 것 역시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타인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겠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강요 섞인 설득이라고 느끼는 순간 질문이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중요해 집니다. 그 질문과 대답의 반복은 방해받지 않는 사적공간에서 발생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즉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립적 개체로서 사회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다면 개인에게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절대자유의 세계를 10대에 경험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자기판단의 옳고 그름이나 삶의 균형을 찾아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는 10대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공간의 주도권을 넘길 용기가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4. 무엇을? 이번 시즌에선 물리적/심리적/정서적 공간을 다룹니다. 가족구성원인 타자와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둡니다. 이때 10대는 자기의 공간에 대한 규칙과 물리적 성질을 달리하는 다양한 상상력으로 재구성, 리셋, 변화를 모색합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의 자기 공간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다양한 조건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조금 새롭게 자기 공간에 대한 성찰과 관계방식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조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워크숍은 여전히 다양한 도구와 테크놀로지로 구성합니다. 다만 가장 본질적 접근을 위해 감각적 재미와 즐거움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예정입니다. 호기심만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10대의 방. 우리 자녀의 공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대합니다.

드래곤힐 스파의 정체

Buscant 2021-01-07

용산에 자주 다니면서, 용산(역에서 한강쪽)역 옆에 있는 드래곤힐 스파라는 곳이 늘 궁금했다.
뭔가 입구도 으스스하고 들어가는 사람 본 적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저기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고들 했다.
이름도 드래곤힐이니 뭔가 아재개그인듯도 하고.
그. 런. 데. 두둥.
CNN에서 서울을 가이드영상에 나온다.
럴루럴루 이럴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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