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하게 구분하자면 동일한 예술이나 예술 행위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원본:사본 구분이 의미 없어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예술은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지금 예술행위자, 독립하여 존재하는 작품, 예술을 마주한 향유자 모두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세계에 접근했는가에 따른 비가역적 상황에 가깝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복제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냈었다. 주조(鑄造)와 인쇄 등의 기술이 공격에 가깝게 예술과 한 쌍이 되었던 숨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이 자본과 만나고 시장에 등장하면서 값으로 매겨지기 시작한 후, 희소와 독자성이 상품 가치화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극단적(오죽하면 대체 불가능한 디지털 예술이 등장)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예술과 예술 행위 자체의 유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는 크게 변함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교육 방법에 목마르다. 새로운 방법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행의 문제를 발견했거나, 풀리지 않는 사건이 발생할 때 대안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은 긍정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결이란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과 비례할 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과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문화예술교육에 접근을 시도하는 예술가는 우선 어떤 커리큘럼을 만들어(이 역시 창작의 연장으로)낼지 떠올리곤 한다. 커리큘럼은 문화예술교육에서 요소가 아니라 핵심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행위를 한정된 매체로 전환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지면으로 옮겨 적어야 하고, 추상에 가까운 작업방식을 단어와 문장에 가두고 시간별로 배치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커리큘럼이 왜 유일무이한 것인지 강조하려 든다. 지원사업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창의성 혹은 독창성이라는 심의 규칙 등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관용구가 되어버려서, 실제 어떤 생각을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인지 확인하는 장치로는 기능하지 못한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이 창의성과 독창성이라는 카테고리 속 어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혹은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등의 표현으로 새로운 방식이란 것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늘 하던 대로’라거나 ‘수년간 이어온 작업방식 그대로’라는 문장은 찾기 힘들다. 마치 그것은 노력하지 않고 발전 없는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낙인과 같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예술가가 전문성을 가진다는 것은 늘 하던 방식을 꾸준히 이어오거나, 수십 년간 자기 방식을 실험해온 결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 장면에서는 전혀 다른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조차 희석되어 버렸다면 절망하여 포기하겠으나, 다행인 것은 끊임없이 문제에 공감하는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자가 등장한다. 예술가는 문화예술교육에서 예술행위를 교육으로 복제한다. 예술행위를 복제하고, 예술가의 태도를 복제하고, 감상과 향유의 순간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 학습자가 모방하는 과정을 즐기고, 복제의 끝에서야 내재시킨 감각을 통해 창작 동기가 발현되는 것을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교육자가 되려는 예술가 역시 성장을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수없이 복제하는 과정을 겪는다. 여전히 전제는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이 꾸준히 자기 방식을 반복해온 결실에 대한 복제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자기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커리큘럼이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있다. 관행처럼 여겨지는 프레임 안에서는 예술가가 이런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집단의 교육환경을 구성하는 것, 교육 시간의 비유동적 배정, 비자발적 참여 배경, 예산 규모에 따른 재료선택과 시간 편성 등등. 이미 정해진 것이 많기 때문에 예술교육을 위한 작업의 융통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이 글에서 말하는 복제는 사라진다. 한 뼘만 강하게 표현하자면 ‘처리’하기에 더 가까워진다. 1:다(多)에서 벗어나는 환경을 만들거나, 불특정 학습자의 첫 대면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학습자로 상정하거나, 자율성에 근거한 작업시간의 협의를 교육 장면에서 풀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으로 복제하기 시작한다면,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