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 10년이 넘어간다. 정책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소위 문화계와 예술계의 지형이 변화한 것도 사실이다. 변화는 곧 전진하거나 발전한 것과 등치시켜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은 어떤 교육 행위자를 양산하게 되었는가. 그 행위자는 누구인가가 궁금해진다. 우리사회에서 형식교육과는 어느 정도 무관하거나 대안적 성격을 가진 개인과 단체가 부각되었다. 예술과 놀이로부터 시작하여 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이 건강한 문화적 경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전국의 문화예술인이 매개가 되어 교육행위가 일어났다. 시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기에 자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세인의 관심이 폭발적일 순 없었다 해도 커뮤니티에서는 삶의 궤적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행위자(또는 행위자군)가 문화예술교육의 장으로 진입했다. 진입경로야 모두 다르겠으나 이미 꾸준히 문화예술교육에 포커스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붐업이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고민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육자의 절대수가 준비되지 않았고, 정책이나 사업은 공공의 장에서 펼쳐지게 되므로 다수를 만족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거나 기준이 다른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교육자가 없는데 교육행위는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사실 아직도 해갈되진 않았다. 피교육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두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을 목격할 때 이런 생각을 지우기란 힘들다. 아동, 청소년, 장애인등으로 구분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 피교육자인가에 따라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문화예술교육은 기능교육이 아니라고 틈틈이 또는 전면에 내세워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니지만 어디 그러한가. 여전히 피교육자에 대한 배려없는 집체교육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반문화적인 환경에서 비문화적인 교육자가 문화적인 예술교육을 행하고 있는 상황도 자주 드러나곤 한다. 교육자의 절대수가 부족할 만큼 정책과 사업은 양적으로 팽창했다. 때론 양적확산의 결과가 질적 성장을 불러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문화예술교육이라 불릴만한 단체들이 자기모습을 정돈하고, 기존의 사업이 두 세배로 늘어나면서 더욱 활동이 잦아지는 경우를 보게 된 것은 매우 흐뭇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 문화예술교육행위자가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이거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되거나, 굳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함정에 뛰어들게 된 모양새다. 문화예술교육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거나, 전문성 여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예술을 기능으로 훈련시키는 훈련프로그래머는 최소한 아니다 라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세련된 언어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조금 더 거칠고 날것에 가까운 실체를 마주하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행위자는 피교육자에 대한 폭 넓은 관심과 이해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도시거나 농산어촌이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조건, 생태, 문화로부터 자극받으며 그와 연관된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존을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교육자는 피교육자 개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 개인이 놓은 환경의 보편과 특수를 동시에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행위가 일어나는 시점은 그 관심사(때로는 문제해결이기도 하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또한 교육전문성을 위한 노력이 수반된다. 문화예술교육이 강조될 때는 이미 교육자가 교육받은 내용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접근방법이 부정된 것에 가깝다. 교육자가 깨닫게 된 예술적 상상력이나 실천능력이 긴 시간의 노력으로 얻어졌다면, 보다 정리되고 간결한 교육과정을 생산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 문화예술교육 전문성은 전문예술가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풍부한 삶의 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 더 서술하자면,작업자군의 연대를 상상해야 한다. 개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의 수준을 생각하고 있다면 위의 두 가지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긴 어렵다. 그런 이유로 교육자는 작게는 공동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려 노력해야하고 크게는 전국의 네트워크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진다.

문화예술교육 단체가 늘지만 줄어들었다? 이런 모순을 말하게 되다니 한숨이 나온다. 각종 펀드와 지원이 생기면 그 자본의 흐름을 따라 비대해진 조직의 거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결과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이 확대되지만 단체가 아니라 개인강사가 양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기형적인 모습이다. 특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배정받은 지역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각종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은 어이없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정책과 사업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기뻐 날뛰기 위해 치러야하는 값이 있다. 환경과 대상에 대한 이해, 자발적인 전문성훈련, 교육자간의 연대를 지불해야 한다.